소멸시효가 완성된 후 채무자가 채무를 승인하거나 일부 변제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대해서는 엄격한 해석이 필요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만으로는 시효이익 포기로 추정되지 않아 채무자의 권익이 더욱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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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제162조 제1항은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 채무자가 채무를 승인하거나 일부 변제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까지 우리 법원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는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법리를 적용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러한 '추정 법리'가 타당하지 않다며 50년 넘게 이어져온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원고는 2006년부터 2015년까지 피고로부터 4차례에 걸쳐 총 2억 4,000만 원을 차용했습니다.
제1차용금 3,000만 원(이자 연 20%), 제2차용금 9,000만 원, 제3차용금 2,000만 원, 제4차용금 1억 원을 각각 빌리고 부동산에 근저당권을 설정했습니다. 원고는 2016년 2월부터 2017년 7월까지 피고에게 총 1,800만 원을 송금했는데, 이는 제4차용금의 12개월분 약정이자와 일치하는 액수였습니다.
한편 제1, 2차용금의 이자채무는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이후 부동산 임의경매에서 총 배당액 5억 4,659만 원 중 4억 6,143만 원을 피고에게 배당하는 배당표가 작성되자, 원고는 제1, 2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배당이의의 소를 제기했습니다.
원심은 기존 추정 법리를 적용하여 "원금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채무자가 채무를 일부 변제한 때에는, 그 액수에 관하여 다툼이 없는 한 그 원금채무에 관하여 묵시적으로 승인하는 한편 그 이자채무에 관하여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심법원에 환송했습니다(2023다240299 판결).
대법원은 먼저 기존 추정 법리의 근본적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자의 채무승인으로부터 시효완성에 관한 채무자의 인식 및 그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법리이다.
이러한 인식의 추정 및 의사표시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하여 인정되는 사실상 추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난다." 대법원은 시효완성에 대한 인식의 추정이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시효완성 여부는 소멸시효기간, 소멸시효 기산점, 소멸시효의 중단 또는 정지 사유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에 대한 판단은 때로 불명확하고 복잡하므로 단지 소멸시효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대법원은 소멸시효 중단사유인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가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개념임을 강조했습니다.
"소멸시효 중단사유인 채무승인은 소멸시효가 완성되기 전에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으로 채권을 상실할 자에 대하여 상대방의 권리 또는 자신의 채무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을 표시함으로써 성립하는 관념의 통지이다. 시효이익 포기는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에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알면서 이로 인한 법적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성립하는 의사표시이다.
" 대법원은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대해서는 엄격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은 권리 포기 등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의사표시는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법리를 펼쳐 왔다... 그런데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행위만을 근거로 하여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손쉽게 추정한다."
대법원은 시효이익 포기 여부에 대한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는 일부 변제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및 자발성, 일부 변제액과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무액 사이의 차이, 일부 변제 당시 시효기간을 도과한 정도, 일부 변제 당시 및 전후의 언동, 당사자들의 관계와 거래지식 및 경험 등 개별 사안에 존재하는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원고가 2016. 2. 6.부터 2017. 7. 6.까지 합계 1,800만 원을 피고에게 일부 변제한 사실은 인정되나, 그것만으로 당시 원고가 제1, 2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그로 인한 법적인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50년 넘게 확립된 판례의 변경입니다. 1967년 판결 이래 지속되어온 추정 법리를 전면 폐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둘째, 채무자 보호 강화입니다.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만으로는 시효이익 포기로 추정되지 않아 채무자의 권익이 더욱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개별적 사안별 판단 강조입니다. 획일적 추정 대신 각 사안의 구체적 정황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넷째, 의사표시 해석의 엄격성입니다. 권리 포기와 같은 중대한 불이익을 수반하는 의사표시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하고 엄격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기존 추정 법리의 근본적 한계를 직시하고 개선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소멸시효 제도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시효완성 여부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선의의 채무자가 단순히 일부 변제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시효이익을 상실하는 것은 부당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 판례 변경으로 인한 실무상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효이익 포기 여부를 판단하는 구체적 기준이 명확해질 때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이번 판례 변경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채권자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만으로는 시효이익 포기를 확신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더욱 명확한 의사표시를 받아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채무자는 시효완성 후라도 함부로 변제하기보다는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결국 이번 판결은 형식적 법리 적용보다는 실질적 정의 실현을 추구한 것으로, 우리 민사법의 발전에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음플러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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