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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울 가는 길 8] 봉배산 적석환구유구는 '‘소도(蘇塗)'의 원형

기사승인 23-01-1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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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배산 적석환구유구 가는 길 
고리울 청동기 유적공원에서 구름다리를 건너가면 봉배산 꼭대기가 나온다. 경인고속도로가 봉배산을 반토막 낸 바람에 청동기 유적지도 반토막이 났다.
 
봉배산 정상에서 완만하게 내려온 등성이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그 등성이 일부가 무자비하게 잘려나가 버린 것이다. 지금 고속도로를 만든다면 이렇게 산등성이를 잘라내지 않고 터널을 만들 터인데... 1968년도엔 산을 잘라내는 것이 기본이었다.
 
경인고속도로의 설계가 동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옮겨졌더라면 세계적인 봉배산 적석환구유구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이 북쪽으로 옮겨 설계가 된 바람에 청동기 시대 천신제를 지내던 제사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적석환구유구 지역을 빙둘러 줄이 쳐져 있고,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적석유구는 비닐로 덮고 그 위에 맥문동을 심어 놓았다. 그 옆엔 참나무가 거칠게 뿌리를 뻗어 내리고 있다.
 
 
적석환구유구 지적도 <한도훈>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부천 봉배산 꼭대기에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이 있다. 적석환구유구(積石環溝遺構). 한자로 된 이 용어만 보면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아주 어렵게 정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꼼꼼하게 따져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두 가지 유구(遺構)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구(遺構)란 한마디로 청동기인들이 남겨놓은 움집터, 고인돌, 돌덧널무덤, 적석(積石), 환구(環溝) 등을 가리킨다. 봉배산에서 유구는 적석(積石)과 환구(環溝)이다.

이곳에서 적석(積石)의 의미는 뭘까? 왜 이곳에 돌을 무더기로 쌓아 놓았을까? 돌무지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봉배산 꼭대기에 돌을 쌓아놓았을까? 이렇게 돌을 쌓아놓고 무슨 일을 한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깬돌, 적석유구의 의미 
봉배산 꼭대기에 쌓여진 적석(積石)은 대부분 깬돌이다. 한자로는 할석(割石)이다. 큰 돌을 조각조각 나누어서 쌓았다. 둥글게 쌓았다. 아니 현재 둥근 모습으로 남아 있다. 동서(東西)로 6m, 남북(南北)으로 6m이다. 아주 큰 돌무지이다.

돌무지에서 가운데가 불룩하게 솟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푹 꺼졌다. 여기서 불룩하게 솟아있다는 얘기는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불룩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전체가 6m인데 가운데 부분인 5m 정도가 불룩하게 솟아있고, 나머지 1m 정도가 푹 꺼져 내렸다는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가장자리 부분에 큰 깬돌을 둘렀다는 것이다. 보통 깬돌의 크기가 지름이 10~30㎝인데, 큰 깬돌은 50㎝ 정도 된다. 그 크기가 일정치 않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 이렇게 들쑥 날쑥한 것은 돌을 깨는 기술이 아직 정교하게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가장자리에 큰 깬돌들을 배치한 것은 작은 깬돌들이 흘러내리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다. 봉배산 꼭대기가 약간 경사가 졌기 때문에 작은 깬돌들이 흘러내리면 적석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일 거라는 세심한 계획이 드러난다.

깬돌들이 모두 흩어져버리면 적석을 만들어 놓은 뭔가 의미 깊은 작업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기에 내부에 작은 깬돌들을 흙으로 버무려 다져놓고 그 바깥에 대형 깬돌들을 둘렀던 것이다. 

이렇게 돌들을 깨서 모아 놓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현재라면 큰 돌덩이를 기계로 부수어서 그 시간이 아주 짧지만 지름 6m되는 크기를 다 메우려면 많은 깬돌이 필요한데... 이걸 일일이 손으로 깼을 것 아닌가. 조금 부서지기 쉬운 큰 돌덩이를 돌도끼나 돌망치로 깼을 것이다. 봉배산 청동기유적지에선 돌망치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돌도끼가 돌을 깨는 도구로 유력하게 부상한다.
 
청동기 시대에 돌깨는 기술이 발전했음을 증거해주는 것도 있다. 강릉시 과학산업단지 내에서 청동기 시대의 방어용 시설인 구덩이인 환호가 발굴되었다. 이 구덩이엔 적이 쳐들어왔을 때 적을 향해 던지는 투석전(投石戰)에 사용된 깬돌이 다량으로 들어 있었다. 이렇게 깬돌이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깬돌 작업 전에 성토(盛土)까지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깬돌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기 전에 사전 작업을 했다는 점이다. 
봉배산은 황토산이다. 이 황토산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는지 세 번에 걸쳐 성토(盛土)를 했다는 것이다. 성토(盛土)란 본래의 땅에 다른 땅을 가져다가 높게 돋우고 다지는 것을 말한다. 한옥 지을 때 땅을 고르고 거기에 성토를 해서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하고 같다. 아주 단단하게 다져야만 땅이 쉽게 푹 꺼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깬돌을 올려놓기 전에 사전 정지작업으로 세 번에 걸쳐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을 꼼꼼하게 했다는 것이다. 

먼저 깬돌 사이에 채워져 있는 흙이 있다. 낙엽이나 나무뿌리들이 파고 들어 있다. 그 다음 아래로는 흑갈색 점토층이다. 흑갈색은 검은 빛을 띤 갈색이다. 점토는 봉배산 산위에는 있지 않고 산아래 고리울내로 불리는 곰달내의 냇가에서 채취해온 것으로 보인다. 점토는 단단하게 서로 잘 붙어 있어서 사용한 것이다. 이 점토층에서 목탄하고 무문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무늬가 없는 토기가 나온 것이다.
 
 
봉배산 적석환구유구 제단의 적석 <한도훈>
 
 
그 아래는 암갈색 점토층이다. 암갈색은 어두운 갈색이다. 흑갈색과 약간의 차이가 난다. 이 점토는 점성이 아주 강하다. 이 점토를 가지고 성토를 할 때 몇 개의 돌들이 함께 들어간 걸로 보인다.

그 다음 아래는 적갈색 점토층이다. 이 점토도 아주 점성이 강하다. 그 아래는 풍화암층이다. 이렇게 점토를 가지고 성토를 했다는 것은 적석환구유구(積石環溝遺構)가 정말 신성한 제단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이 신성한 제단을 만들기 위해 당시 청동기인들이 냇가에 가서 많은 양의 점토를 가져다 날랐을 것이다. 고리울내인 곰달내에서 점토를 퍼담아 날랐을 물건이 함지박이었을까? 전혀 알 수 없지만 함지박 같은 그릇에다 점토를 담아가지고 산꼭대기까지 힘겹게 올랐을 것이다. 세 번이나 다지고 다지려면 많은 양의 점토가 필요했을 터... 신성한 장소였기 때문에 청동기인들이 전부 동원되었을까? 아니면 남정네들만 이 일을 했을까? 남정네들이 울력을 하면 여인네들은 점심밥이며 저녁밥을 준비했을까? 이 깬돌을 쌓는 작업을 총지휘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봉배산 청동기인들의 족장이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두 가지를 겸하고 있는 누군가였을 것이다. 

봉배산 꼭대기에서 한바탕 울력이 벌어졌을 것이다. 매일같이 사냥으로 단련된 몸을 가진 근육덩이의 남정네들이 고리울내인 곰달내에서 점토를 퍼 나르는 모습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을 것이다. 이를 지켜보며 족장은 격려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자자, 힘들 내시게. 하늘에 계신 한울님이 우릴 굽어보고 계시네.”
참, 봉배산 제단은 원형이었을까? 사각형이었을까? 답은 사각형이다. 현재는 원형이지만 그때는 사각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깬돌을 올려놓기 전에 점토로 세 번에 걸쳐 다져놓았다. 그것도 사각형으로... 그 위에 깬돌을 올려놓았다. 결론적으로 봉배산 제단은 원형이 아니라 사각형이었다는 말씀...

도랑, 환구유구의 의미 
천신인 한울님에게 제사를 지낼 제단(祭壇)이 마련되자 이 ‘신성한 구역’을 구별짓기 위해 둥글게 도랑을 파기 시작했다. 환구(環溝). ‘고리를 닮은 도랑’이라는 뜻이다.
 
 
봉배산 적석환구유구의 환구유구 <한도훈>
 
 
왜 큰 도랑을 팠을까? 이 도랑의 용도는 뭐였을까?    
환구(環溝)는 다른 말로 환호(環濠), 호구(壕溝) 등으로 불린다. 환호(環濠)는 일본에서 온 말이다. 일본 고고학 연구자들이 야요이 시대(彌生時代)의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그 개념적인 정의가 최초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이 용어를 차용했다. 나머지는 환구를 대신해서 쓰기도 하는 똑같은 말이다. 

다른 말로 해자(垓子)라고 한다. 보통 선사시대 마을 주위로 깊게 고랑을 팠다. 도랑에 물을 채워 적이 마을을 침입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가장 위력적인 방어시설인 셈이다.

무덤 주위에도 도랑을 팠는데 주구(周溝)라고 한다. 이 도랑에는 물을 채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도랑이 ‘신성한 구역’이나 ‘무덤’을 파고드는 수해 때 불어난 물들을 빼내는 역할도 했다.

봉배산의 환구(環溝)에는 물이 없다. 산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물이  없을 수밖에 없다. 수해로부터 적석유구를 보호해야만 했을 터이다. 더구나  제사장이나 족장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적석유구에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신성한 지역이기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구분을 해놓았다.

청동기 시대에는 이 적석환구유구가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봉배산 꼭대기에 오른 청동기 마을 사람들은 도랑을 건너 함부로 침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석환구유구 바로 아래에 움집을 짓고 살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니까 제12호 움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움집에 살던 분은 자유롭게 적석환구유구를 드나드는 족장이었을까? 아니면 적석환구유구를 지키는 이였을까?

만약에 적석유구(積石遺構)에 들어간 것이 발각되었을 때에는 어떤 벌을 받았을까? 만약에 큰 죄를 짓고 서쪽문을 통해 적석유구로 들어온 죄인이 있다면 그냥 잡아갔을까? 아니면 어느 누구도 적석유구 시설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돌기만 했을까? 그게 마한시대에 있었다는 소도(蘇塗) 아닐까? 소도의 원형 말이다.
 
봉배산 환구(環溝)는 돌무지 제단을 중심으로 빙 둘러 조성이 되었다. 형태는 거의 원형이다. 이 환구는 바깥선을 기준으로 할 때 직경이 30m 정도나 된다. 아주 큼직한 도랑이 산꼭대기에 생겨난 것이다. 환구의 북쪽에는 아주 짧은 도랑이 휘어져 있다. 이중으로 도랑이 파진 것이다. 서쪽에는 폭 1m 정도로 도랑이 끊겼다. 이 부분이 돌무지인 적석(積石)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봉배산의 적석환구유구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 이 문은 항상 열려 있고 열쇠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보이지 않는 금줄을 걷어내고 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배짱이 당시 청동기인들에게 있었을까? 
 
 
적석환구유구에서 적석유구 자리 <한도훈>
 
 
도랑의 총길이는 63m이다. 도랑의 폭은 3~4m이다. 이 같은 도랑은 아주 큰 편이다. 그런데 남동쪽 도랑의 폭은 급격하게 좁아져 1m 정도 밖에 안 된다. 도랑의 깊이도 보통 1m 정도이다. 남동쪽은 0.3m 정도이다. 남동쪽의 도랑이 폭과 깊이가 작은 것은 급경사가 졌고,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깎여 나가서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소도(蘇塗)의 원형 
봉배산 적석환구유구에서 나온 제기형토기, 바퀴날도끼인 달도끼 등으로 미뤄 볼 때 제사터가 틀림없다. 환구유구 북쪽에 불자리가 발견되었고, 제기형 토기에 탄화된 유기물질까지 검출된 걸 보면 여러 번 제사를 지내면서 제물을 올렸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이곳의 제사는 누굴 향해 올렸을까? 고인돌이나 무덤에서 올리는 제사는 당연히 조상들의 혼백을 향한 제사였다. 하지만 이곳의 적석환구유구는 무덤 자리가 아니다. 돌무지무덤이라면 아래에 널방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널방은 없고 제단이 무너지지 않게 단단하게 다지는 성토작업을 했다.

그런데 청동기 시대 제사 용구로 사용했던 청동거울, 팔주령, 쌍주령 등이 출토되지 않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신제를 지냈지만 필수적인 이들 제품들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사실, 봉배산 청동기 유적지에선 청동기 제품이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 전부가 돌로 만든 제품들이었다. 

하지만 봉배산 적석환구유구는 소도의 원형(原形)으로 이해되고 있다. 소도의 원형이라? 소도(蘇塗)는 삼한 시대에 있었던 신성한 지역이다.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서는 삼한에서 행해지고 있던 소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늘 5월에 씨뿌리기를 하는 하종(下種)을 마치면 귀신(鬼神)에 제사 지내며 무리지어 모여 가무(歌舞), 음주(飮酒)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서서 서로 뒤따르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며 손, 발을 서로 맞추는데 그 가락인 절주(節奏)는 중국의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귀신(鬼神)을 믿으며 국읍(國邑)에 각각 한 명씩을 세워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그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한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蘇塗)라 부르며,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立大木)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鬼神)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들이 그 곳에 도착하면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니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蘇塗)를 세우는 뜻은 불탑인 부도(浮屠)와 유사하나 ‘선을 행하냐 악을 행하냐’의 차이가 있다.”

보통 오월과 시월에 두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귀신은 천신을 낮추어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천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천군이라고 못 박아 놓고 있는 걸로 유추할 수 있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굳이 천군이라고 그 이름을 높여 부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천군으로 인해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한 시대 정치는 정치지도자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신제는 천군에 의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삼한 이전 시대인 청동기 시대에는 이 천군과 정치지도자가 분화되지 않고 한 사람이 두가지 역할을 다 했을 것이다. 

삼한 시대 별읍에서 천신이 주관하는 하늘 제사를 지내는 곳이 소도(蘇塗)라는 곳이다. 별읍이 곧 소도. 소도는 제사의 영역으로 정치적인 영역하고는 다른 별읍이라는 뜻이다. 정치적인 영역의 도읍은 국읍이라고 한다. 

이 소도에는 아주 큰 신목을 세워놓고 그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신목을 보통 솟대라고 부른다. 도망자들이 소도에 들어와도 모두 돌려보내지 않는 신성한 지역이다. 이 소도의 원형이 부천 봉배산의 적석환구유구라는 것이다.

봉배산에 둥지를 튼 청동기 집단 거주지가 삼한의 별읍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진단이다. 이 별읍처럼 천신제를 지내며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도훈
 
한도훈 1961년 전남 나주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역사, 문학 등을 좋아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문학인으로 창작활동에 매진해 왔다.
부천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89년도이다. 이때부터 책사랑 도서실 운영, 부천시민신문 기자, 부천실업학교 국어교사, 부천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부천문화원 백일장 심사위원장, 부천시립도서관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해 왔다. 부천이뉴스, 미추홀신문, 월간 사람과 사람들에서 편집인, 편집국장으로 일을 했다.
부천문화원 향토사 체험학습 강사를 하면서 부천지역 역사탐방을 진행했다. 부천 지역사회교육협의회에서 부천역사문화 해설사 과정에서 강사로 참여했고, 부천시 향토역사퀴즈왕 선발대회 총괄 주관을 맡기도 했다.
콩나물신문사 편집위원장으로 ‘내고향 부천이야기’ 연재를 했으며, 부천향토연구회 콩시루에서 부천역사 해설사 강좌를 진행해오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 인천작가회의 회원, 시와문화 작가회 회원, 시산맥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천 역사문화 관련 집필로는 ‘부천시사 땅이름 분야 집필’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 ‘신나게 부천을 배우자’ ‘장말도당굿’ ‘부천역사문화투어’ ‘고리울 가는 길’ ‘대장 마을 가는 길’ ‘대장 마을 사진집’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 ‘벌거벗은 신들의 세상1, 2’가 있으며 동화로는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소라의 용못’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오늘, 악어떼가 자살을 했다’ ‘홍시’ ‘코피의 향기’가 있다. 시와문화 신인상을 받았다.

한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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